- 휴…… 좋아, 이 녀석으로 끝인가.
거들게 해서 미안하다, 실뱅.
- 아니,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.
설마 첩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.
- 난 첩자를 하던 인간이었으니까.
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거든.
- 적도 제법 능숙한 것 같긴 했지만,
너랑 마찬가지야. 적의를 감추는 게 서툴러.
- 이쯤 되니, 그냥 네가 너무 예리한 것
같기도 한데 말이지……
- 그야 익숙해서 그렇지, 익숙해서.
그보다 난 너 때문에 더 놀랐다고.
-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려 주자마자
네 일 처리가 얼마나 빠르던지.
- 마치 데이트라도 가는 것처럼 태연하게
첩자 제거에 나서는 녀석은 처음 봤다.
- 그런 문제는 얼른 처리하는 게 낫잖아.
폐하도 사후 보고로 화낼 분은 아니고.
- 중요한 건 우리가 전쟁에 이기는 것……
정보 하나로 승패가 갈리는 게 전쟁이니까.
- 뭐, 설령 정보 면에서 우위를 점했다 한들
무력의 차이 때문에 지는 경우도 있지만.
- 아리안로드 전투가 좋은 예지.
그땐 나도 완전히 이긴 줄 알았는데……
- ……충분히 호된 꼴을 당했었다고.
그건 기사단이나 형의 분투가 낳은 승리였어.
- 거기서 사투를 벌인 상대에게 이제는 등을
맡기고 싸우다니, 묘한 일이지.
- 네 입장에서는 형의 원수잖냐, 나는.
동료로 들이기도 심란했겠지.
- 그렇지 않아. 널 아군으로 들여서
전쟁에 이길 수 있으면 난 그걸로 족해.
- 처음 만났을 땐, 그저 네가 신뢰할 만한
상대인지 판단할 수 없었을 뿐이었고……
- 흐음…… 그래서, 지금은 어떤데?
나는 신뢰할 만한 상대인가?
- 지금까지는.
게다가 이번엔 네 직감의 도움도 받았고.
- ……하지만, 여긴 내가 지켜야 할 장소야.
배신하면 어떻게 될지는 너도 알지?
- 가벼운 척하면서 의외로 충신이시군.
그런 올곧은 녀석은 싫어하지 않아.
- 안심해, 아직 배신할 예정은 없으니까.
앞으로도 계속 사이좋게 지내자고, 도련님.
- 그래, 그러자. 넌 여러모로 말이 통하니까
나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거든.
- 호오, 서로 같은 마음이라 이건가?
밀회는 언제든 환영이다만……
- 그때는, 처음 만났을 때보단 나은 대사로
꼬셔야 할걸? 정말 심각했으니까!
- 「안녕, 아기 새처럼 가련한 아가씨!
괜찮으면 저쪽에서 잠시 얘기나……」
- 아 정말, 여자애로 착각한 건 미안하다니까.
몇 번이나 사과했잖아!
- 아하하하! 차기 고티에 변경백을
놀려 먹을 거리가 생겼군그래!
- 난 딱히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.
얼굴이 이러니, 착각하는 녀석도 더러 있거든.
- 오히려, 여자인 척을 해서라도
너와 얘기할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해.
- 차기 변경백 각하와 장래를 염두에 두고
교제할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잖냐.
- 참 열렬한 구애가 다 있군…… 딱히
기분 나쁘지도 않은 나도 제정신이 아니야.
- 그렇지? 사람을 꼬실 땐
이렇게 하는 거야, 실뱅.
- 나 참…… 정말 적으로 돌리기 싫은 녀석이야.
네가 출세한 이유도 어쩐지 알 것 같다.
- 앞으로도 잘 부탁해. 서로 장래를 염두에
둔 교제라는 걸 해 보자고.